[중국 47] 20세기 중국의 운명을 바꾼 서안사변
[중국 47] 20세기 중국의 운명을 바꾼 서안사변
  • 정거배 기자
  • 승인 2016.01.04 1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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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의 황제 장학량과 장개석 부인 송미령과의 로맨스
사진 우측부터 장쉐량, 쑹메이링, 장제스

1936년 12월 12일 새벽 5시였다. 중화민국의 권력 서열 2인자이자 동북군총사령관 장쉐량(張學良, 1901~2001)은 국가원수이자 국민혁명군 총사령 장제스(蔣介石)를 체포했다.

장제스는 공산당 섬멸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직접 시안(西安)까지 와서 온천지인 화청지에 묵고 있었다. 이날 새벽 36살의 젊은 군인 장쉐량의 부하들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욕을 즐기며 사랑을 나누던 화청지를 포위하고 장제스의 경호 병력을 제압했다. 잠옷차림으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뒷산으로 몸을 피한 장제스는 장쉐량의 부하들에게 발각됐다.

시안사변은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침략자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이듬해 1937년부터 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고 8년 간의 항일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중국의 운명을 갈랐던 시안사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나라가 역사의 무대로 사라진 1911년 신해혁명부터 설명해야 한다. 쑨원(孫文)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타도되고 1912년에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한다. 중화민국은 중국동맹회를 이끈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고 난징(南京)에서 정식 출범했다.

그러나 쑨원은 중국대륙의 통일을 위해 북쪽에 있는 북양군벌의 수장인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임시대총통직을 양보한다.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은 남쪽이 주도했지만 중국 분열을 막기 위한 쑨원의 판단이었다.

일본의 만주침략과 장제스

중화민국 전반부는 북양군벌이 지배하는 베이징정부시대(1912~1928)이고 후반부는 쑨원에 이어 장제스가 주도하는 국민당의 난징정부시대(1928~1949)로 본다. 중화민국의 후반부는 국민정부라고 부르는데, 국민당이 중국 대륙의 군벌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중국대륙의 통일정부가 되며 1928년 10월 장제스가 국민정부의 주석으로 취임한다.

쑨원은 3년 전인 1925년 지병으로 사망한다.
랴오닝성 출신으로 비적으로 활동했던 장쉐량의 부친 장쭤린(張作霖)은 베이징정부 시절인 1927년 북양군정부 육해군대원수로 취임한 중화민국의 실권자였다. 친일 성향이 강했던 그였지만 1928년 6월 4일 일본군의 의해 열차 폭발사고(황구툰 사건)로 암살된다. 부친 장쭤린이 사망하자 28세의 장교 장쉐량이 동북 3성의 1인자로 앉게 된다. 이때까지 장쭤린의 북양정부는 국민당의 난징정부와는 별개로 독립된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장쭤린은 동북의 황제였다.

그해 12월 장쉐량은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동북지역 주권을 넘겨준다. 이렇게 해서 중국 대륙은 난징정부에 의해 진정한 통일을 이루게 된다. 그러면서 장제스는 장쉐량을 동북변방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장쉐량은 주권은 넘겨줬지만 여전히 동북의 30만 대군을 지휘하는 실권자였다.

그 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동북의 요충지 센양(瀋陽, 옛 이름은 봉천)을 점령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침략에 나선다.

그런데 장쉐량은 장제스의 방침대로 무대응으로 동북지방을 일본에게 내주고, 대신 마오쩌둥의 홍군을 소탕하기 위해 시안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다.

중국 동북(동베이) 3성이란 랴오닝성(遼寧省, 요녕성), 지린성(吉林省,길림성), 헤이룽장성(黑龍江省,흑룡강성)의 3개의 성을 말한다.
국·공합작, 공산당 회생 기회로 작용

1936년 시안사변은 13년 뒤에 있었던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 시안사변은 괴멸 직전에 봉착했던 마오쩌둥의 홍군이 회생하게 된 기회를 줬고, 중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이었다. 시안사변이 없었다면 과연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장제스는 당시 동북지역 점령한 일본제국주의보다는 먼저 공산당을 소탕해야 한다는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장제스의 안내양외(安內攘外), 이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내부를 평정해야 한다는 정책이다.

장제스를 감금한 장쉐량은 8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압축하면 ‘정지내전 일치항일’이다. 현재의 남경정부(중화민국)를 개조해 각 당 각파를 모두 용납하며 구국의 공동책임을 지고 일체의 내전 정지를 요구했다. 상하이에서 신병치료차 요양 중이던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은 시안을 폭격하겠다는 난징정부의 강경방침을 보류시키고 사건 발생 10일 뒤인 12월 22일 시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쑹메이링은 시안 비행장까지 마중 나온 장쉐량을 보고 굳었던 표정이 밝아졌다. 사실 쑹메이링은 1927년 12월 장제스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핸섬한 동북지역의 젊은 장교 장쉐량과는 로맨스가 있었다.

송과 장의 연정은 세기의 미스테리

쑹메이링은 장쉐량이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상하이를 올 때마다 만나 극장도 가고 댄스홀도 함께 다닐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장쉐량은 이미 결혼했기에 부인이 있었지만 4년 연상의 쑹메이링을 사랑했다.

장쉐량도 “만약 내가 미혼이라면 쑹메이링은 내 여자”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나중에 부인이 셋이나 되는 등 여자관계가 복잡한 장제스가 5년이나 걸린 구혼 끝에 1927년 쑹메이링과 결혼하게 된다.

쑹메이링은 감금된 남편 장제스를 대신해 장쉐량과 마오쩌둥의 홍군을 대표해 옌안에서 온 저우언라이(周恩來)와 3자 협상이 시작됐다. 내전중지와 항일전쟁, 옌안을 지방정부로 인정할 것과 반란(?)을 일으킨 장쉐량의 신병보장, 그리고 장제스를 최고 지도자로 추대할 것 등을 쉽게 합의했다.

결국 장제스는 장쉐량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쑹메이링이 시안에 온 지 3일 만에 시안사변은 평화적으로 끝나고 장제스는 풀려났다.

12월 25일 장제스가 탄 난징행 비행기에 장쉐량도 마중 차 함께 탔다. 난징까지 장제스를 마중해 주기 위해서였다. 장쉐량의 이 길은 그가 죽기 직전인 반세기 동안 계속된 연금생활의 시작이었다.

젊은 장군 장쉐량은 이미 이런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간 결행한 장제스의 감금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니다.

이듬해인 1937년 항일전쟁의 시작과 1945년 항일전쟁의 승리 그리고 국·공 내전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지는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이다.

1911년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청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소설 <삼국연의>의 소재가 됐던 1,700년 전의 사건, 위·촉·오로 천하가 삼분됐던 것처럼, 그 뒤 중국대륙은 중화민국의 국가원수 장제스, 홍군을 이끌고 있던 중원의 마오쩌둥 그리고 동북의 패권자 장쉐량이었다. 시안사변으로 장쉐량은 감금되면서 천하대결은 이제 마오쩌둥과 장제스로 압축되게 된다.

시안사변은 중국의 1인자인 장제스가 2인자인 장쉐량에게 협박당하기는 했지만 합의내용처럼 마오쩌둥의 공산당까지 참여해 자신을 중화민국의 최고 지도자 추대했다는 점에서 결코 정치적으로 손해만 입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전보다 장제스의 위상은 더 굳건해졌다.

가장 덕은 본 것은 마오쩌둥의 홍군, 중국 공산당이었다. 당시 홍군은 2년간의 1만2천500km 장정을 마치고 옌안에 정착하고 있을 때였다. 홍군은 1934년 10월 장시성을 떠날 때는 8만6천여명의 달했지만 추격하는 장제스의 군대의 공격에 겨우 살아남은 병력은 1만여 명에 불과했다.

이제 장제스의 계획대로 옌안을 포위해 홍군을 섬멸시킬 참이었다. 그러나 시안사변으로 장제스의 이런 괴멸작전은 취소되고 항일전쟁을 위한 국·공 합작이 이루어지면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국공합작으로 홍군에서 팔로군으로 이름을 바꾼 마오쩌둥의 군대와 중국 공산당은 조직을 추스르고 인민들과 접촉면을 확대하면서 결국 1949년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반세기 동안 연금 생활

난징까지 온 장쉐량은 12월 31일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의 특별군사법정에 섰다. 재판부는 징역 10년에 5년간 공민권 박탈을 선고했다.

다음날 장제스는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장쉐량의 특별사면을 정부에 요청했다. 군사위원회가 장쉐량의 신변을 인수해 엄격히 관리 단속한다는 조건으로 특별사면은 승인됐다. 군사위원회는 장쉐량을 장제스의 공향 시커우로 이송해 여행사 초대소로 이송하고 군인들을 배치해 24시간 감시했다.

1937년 1월에 시작된 장쉐량의 연금생활은 1990년 6월 1일 타이완에서 해제될 때까지 53년 5개월간 계속됐다.
그런데 장제스는 시안에서 감금돼 있을 때는 사건 해결 뒤 장쉐량의 신변보장을 약속했었다. 홍군의 저우언라이에게도 약속했고 부인 쑹메이링과 사태수습을 위해 함께 시안에 왔던 처남 쑹즈원에게도 공언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1975년 죽을 때까지 장쉐량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장쉐량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버지 장제스에 이어 아들 장징궈(蔣經國) 타이완 총통이 사망 한 뒤였다. 장쉐량은 1991년 봄 타이완을 떠났고 2001년 봄 미국 하와이에서 101세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장쉐량을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공신’이라고 평가했다.

장제스가 마오쩌둥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인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것도 이런 스타일 때문이었다. 장제스로부터 민심이 떠나간 것은 공산당과 2차례 합작을 한 뒤에도 약속을 수차례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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