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6] 루쉰, 반식민지로 전락했던 그 시대 중국의 ‘외침’
[중국 46] 루쉰, 반식민지로 전락했던 그 시대 중국의 ‘외침’
  • 정거배 기자
  • 승인 2015.12.2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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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렬한 비판과 각성 촉구, 좌절의 시대 희망을 말하다


한국인들의 중국 상하이 여행을 가게 되면 필수코스가 신천지 부근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건물을 방문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윤봉길 의사가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폭탄을 던졌던 홍커우공원을 가보는 것이다.
김구선생이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잔학한 일본제국주의에 온 몸으로 저항했다.

폭탄 투척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과 상하이 일본거류민단당 가와바타 사다쓰구가 사망했고 시게미쓰 마모루 주 중국 공사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의사가 감행한 거사를 한 곳이 바로 홍커우공원이지만 지금은 루쉰공원(鲁迅公园)이다.

이곳은 1927년 루쉰(鲁迅)이 대륙 남쪽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옮겨와 생활한 곳이기 때문에 인연이 됐다. 루쉰은 생전에 홍커우공원을 자주 산책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다른 곳에 매장돼 있던 그의 유해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1956년에 이곳으로 이장됐다. 또 공원에는 루쉰 기념관이 건립됐다.

문인이기보다는 혁명가이자 사상가

1881년 저장성 샤오싱에서 태어나 1936년 10월 폐결핵으로 결코 길지 않았던 56세의 생을 마감한 루쉰(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그는 누구인가? 우리에게는 『아큐정전(阿Q正伝)』,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을 쓴 소설가 또는 문학가로만 알려져 있다.

또 지난 80년대에 한국에서는 루쉰의 산문집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朝花夕拾)』이 번역돼 출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20세기 초 반봉건·반식민지 상태의 중국을 깨우기 위해 투신했던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그는 그 시대 중국인들이 외세에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오직 황제(黃帝)의 후손이라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착각 속에 갇혀 있는 인민의 현실에 분노했다.

스스로가 세상 나라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청나라가 서구 열강 제국주의에 유린당하기 시작한 것은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이었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는 상하이 등 주요 도시를 개방하고 홍콩을 넘겨주는 등 반식민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조선에서 갑오농민혁명이 있었던 그해, 1894년부터 2년간 치렀던 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기 시작했다.

변법자강과 양무운동 등 쇠망해 가는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수많은 움직임들이 있었던 그 시대를 전후해 루쉰은 비교적 부유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관료였던 조부는 뇌물사건으로 투옥되고 부친은 병을 얻으면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집안의 장남이었던 루쉰은 집안의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부친의 약을 구해 와야 하는 등 어릴 때부터 불우하게 보내야만 했다.

그의 나이 15세 때인 1896년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난징에 있는 강남수사학당과 광무 철도 학당을 시작으로 가난한 환경 속에서 배움의 길에 나섰다. 그가 이때부터 서양 근대 사상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책과 잡지, 신문 등을 읽으면서부터다. 또 진화론 영향을 받으면서 세계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 중 겪었던 환등기 사건

결국 1902년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됐다. 부친의 병을 지켜봤던 그는 새로운 의술을 통해 기울어가는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904년 9월 그는 일본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 때가 일본과 러시아가 랴오닝 반도 등 만주 땅을 놓고 전쟁을 하고 있을 시기였다. 센다이 학교에서 루쉰은 자신의 길을 바꾸는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이른바 환등기 사건이다.

어느 날 세균학 수업 도중 쉬는 시간을 이용해 교수가 보여주는 환등기로 본 사진 한 장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 간첩 혐의를 받은 중국인을 일본군이 처형하는 장면이었다. 루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밧줄로 묶인 중국인을 처형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빙 둘러 서 있는 같은 동족의 중국인들, 그들의 모습은 한결 같이 무표정하고 무감각했다. 건장한 체구의 구경꾼들은 동족이 참수돼 죽어가는 모습을 분개하기는커녕 그저 무기력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는 장면을 보고 루쉰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무너져 가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육신을 치료하는 일 보다는 무지몽매한 중국인들의 의식을 변화시켜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를 자퇴하고 도쿄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메스가 아닌 펜을 통한 문예운동으로 중국인들의 의식을 개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7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그는 고향인 샤오싱에서 교사로 지내기도 했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글쓰기와 번역작업 등을 통해 서양사조와 사상을 중국에 알리는데 주력했다.

그의 중단편 소설인 1921년에 쓴 『아큐정전(阿Q正伝)』, 1918년의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을 통해 신문화 운동과 함께 일본과 서구 열강 제국주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는 중국 사회의 병폐를 고발했다. 또 신해혁명의 그늘을 해학적으로 풍자하기도 했다.

구문학에 대항해 신문학 운동의 기치가 된 광인일기에서 그는 2천여 년 간 지속된 중국의 봉건통치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역사였다고 비유하며 가차없이 비판했다.

봉건체제 관습에 펜으로 저항

그는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인 광인일기를 시작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35년까지 모두 33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루쉰의 작품은 소설 외에도 시와 산문, 수필, 평론 등이 있다.

옛 것에 안주하며 옛날 관습과 사고방식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중국인들을 향해 그는 가차없이 비판했다. 무쇠 방에 갇힌 채 자신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깊이 잠들어 있는 인민들을 향해 날선 비판과 질타를 했다.

안타깝게도 중국은 변하기가 너무 어렵다.
탁자 하나를 옮기고
화로 하나를 개로하려 해도
피를 흘려야 한다.
게다가 피를 흘린다고 해서
다 옮기고 개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커다란 채찍이 등을 후려치지 않는 한
중국은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무덤』 <노라는 집을 나간 뒤 어떻게 되었는가>

청나라가 역사의 무대로 사라지던 1911년 신해혁명을 경험한 그 시대 루쉰이 주장하는 혁명은 구체적이었다. 소설 『아Q정전』에서 “혁명이 승리하고 이상이 실현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혁명이 성공한 뒤 사람들의 생활이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것에 대해 반문했다. 혁명으로 변화된 사회체제나 이데올로기 보다는 인간 자체를 중시했다.

루쉰이 1921년에 발표한 『고향』은 자전적인 소설이다. 1919년 말에 고향에 돌아가서 시골집을 정리하고 노모를 비롯한 전 가족이 베이징으로 이사한 얘기를 작품화 했다. 그는 『고향』에서 고향의 현재와 과거, 어린 시절의 기억, 친구와의 추억, 그리고 시대의 좌절과 희망을 말했다. 또 지금은 암흑과 같은 좌절의 시대를 살고 있으나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

《외침》 『고향』

1936년 상하이에서 그는 사망하기 한 달 전에 발표한 『죽음』이라는 글에서 ‘장례 때 조의금을 받지 말 것’ ‘어떤 기념행사도 하지 말 것’ ‘나를 증오하는 이들이 나를 증오하도록 내버려두라, 나 역시 하나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루쉰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과 사상은 중국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가 세상을 떠난 시기는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의 토벌작전에 쫓겨 달아나던 대장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훗날 마오쩌둥은 “루쉰은 중국 최고의 성인이다. 공자가 봉건사회의 성인이라면 루쉰은 신중국의 성인이다”라고 평했다고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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