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좌제 비롯 백성 감시 시스템 구축, 결국 거열형으로 마감

2016년 3월 2일 테러방지법이 집권당인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의 단독 표결로 통과됐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테러위험인물로 ‘의심만 받으면’ 국정원의 감시와 통신감청, 미행을 당해야 할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테러방지법은 국정원이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금융정보, 개인정보(사상·신념·건강 등 민감정보 포함), 통신기록, 위치정보 등을 수집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해 놓고 있다. 그 뿐 만 아니다. 헌법 제17조에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제18조에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테러방지법 내용이 상위법인 헌법마저 위반하고 있지는 않는지 판단이 필요할 것 같다. 이 법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과 도구가 될 때 민주주의 퇴보는 불을 보듯 훤하다. 청와대나 집권여당은 “대한민국 국민을 테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정권이 교체된다면 야당이 된 새누리당에서는 ‘야당을 탄압하기 위한 악법’이라며 개정을 주장할 것이다. 집권세력 내부에도 감시해야 할 세력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논란 많은 테러방지법은 결코 이 나라에 사는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이 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도 퇴임 후 이 법 때문에 부자유한 신세가 될지 모를 일이다.
상앙 변법, 강력한 백성 통제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서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했던 진(秦)나라를 생각했다. 진나라가 혼란한 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은 여러 분석이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에 살았던 진나라의 재상 상앙(商鞅,BC390~338)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변법 개혁가로서 찬사와 함께 부정적인 평가 또한 지금도 여전하다. 그가 주도한 부국강병책은 긍정적인 것이었지만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마치 5호 담당제와 같은 감시시스템을 만들고 경범죄를 범할 경우에도 중형으로 다스렸다.
중국 역대 통치자들은 “백성은 부리기만 하면 되고, 왜 부림을 받는지를 알게 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위로부터의 추진되는 정책이 백성의 뜻과는 상관없는 경우도 많았다. 어떨 때도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백성을 통제했다.
상앙의 마지막은 비참했는데, 정권이 바꿔져서 역적으로 몰려 수배자 신세가 됐지만 자신이 만든 법령 때문에 안전한 은둔처를 찾을 수 없었다. 관청에서 발행한 여행증명서가 없으면 여관에서 숙박을 할 수 없었다. 결국은 진나라 군대에게 체포돼 최후를 맞을 때도 자신이 개발했던 사형집행법, 팔다리 등 사지를 수레에 연결해 동시에 잡아끄는 거열형으로 처형됐다.
5000년의 중국 역사를 말할 때 되돌아 볼 때 통상 진(秦)나라가 어지러운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BC221년을 기준으로 삼는다. 지금의 산시성 시안(西安) 부근에 작은 부족국가였던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사실을 두고 훗날 다양한 해석과 분석이 이어졌다.
하나라·은나라(상나라)·주나라를 거쳐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든다. 오늘날처럼 영토중심 국가형태라기보다는 성읍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춘추시대는 BC770년부터 BC476년까지를 말한다.
춘추라는 명칭은 산둥성 부근에 있었던 노나라의 역사서에서 근거했다. 춘추시대에 공자가 살았다. 전국시대는 BC475년부터 진나라가 나머지 6국을 제압하고 통일한 BC221년 까지를 일컫는다.
춘추시대하면 ‘춘추 5패’를 떠올린다. 춘추시대 초기 주나라 왕실을 대신해서 천하를 호령했던 5명의 제후들을 말한다. 당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제후국이 노(魯), 제(齊), 진(晉), 진(秦), 초(楚), 송(宋), 정(鄭), 오(吳), 월(越)나라를 가리킨다. 춘추시대는 제후들 간 연합과 동맹 그리고 분열을 거듭한 시대였다. 지금의 장수성과 저장성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오나라와 월나라 간 전쟁은 나중에 오월동주의 성어를 만들어냈다.
전쟁을 통해 전쟁을 끝내다
그러나 춘추시대는 또한 중국 역사상 사상의 황금기였다. 주나라를 지탱하던 봉건제도와 종법제도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사상을 출현하고 새로운 시대로 전환을 모색하던 때였다.
전국 시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진나라는 전쟁을 통해 혼란한 전쟁의 시대의 끝냈다. 전쟁시대를 끝내는 것은 피폐하고 지친 백성들이 원하는 일이었다.
변방쪽에 위치한 진나라가 중국 역사상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무엇보다도 인재 모시기 정책이 주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부족국가 진나라가 추진했던 부국강병정책이 주효했다.
인재개방정책을 폈던 진나라는 당시 각 국에서 모여든 인재들을 활용해 전국시대를 평정할 수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상앙(商鞅, 또는 공손앙이라 부른다)은 진나라를 강성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진효공을 도와 변법을 시행했다.
농업을 중심으로 한 개혁이 가장 눈에 띤다. 상업보다는 농업 발전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개간과 경작을 통해 백성들의 정착을 유도했다. 한 집안에서 일정한 나이가 든 자식들은 분가를 하도록 했다.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상업보다는 정착중심의 농업발전은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인구 증가는 다시 전쟁시 징집할 수 있는 인력들이 많아졌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는 신분과 귀천을 막론하고 공에 따라 벼슬을 내리거나 직급을 올리고 토지를 분배했다.
상앙의 변법은 단순히 법령을 개정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사와 정치, 정부조직, 사회구조, 풍속습관, 도덕가치관, 인생관에 이르는 광범위한 개혁이었다.
연좌제까지 만들어 백성 단속
심지어 길거리에서 세 사람이상 수군거리면 사형에 처했고 연좌제를 실시했다. 연좌제란 5가구, 10가구씩 묶어 한집에서 범법행위를 하면 다른 집에서 관청에 신고하도록 했다. 만약 신고하지 않았을 경우 다른 집들도 함께 처벌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 여전히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와 같았다.
진나라 효공 20년(BC340)는 중원의 강자 위(魏)나라와 전쟁을 했는데 상앙의 계책으로 대승을 거뒀다. 그래서 황하 서쪽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상앙은 이 공으로 상나라(商) 일대 15개 성을 갖는 상군에 봉해졌다. 상앙의 변법은 가혹했다.
변법을 시행한 초기에는 귀족 등 기득권 세력이 반발했다. 이유는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신분에 관계없이 주는 포상제도와 토지 소유권을 일반백성들에게 준 것 때문이다. 그러나 효공의 강력한 추진력 때문에 아무도 드러내 놓고 이의제기를 못했다.
그러나 효공이 죽고 혜문왕이 즉위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귀족들은 상앙이 역모를 꾸몄다며 왕에게 고자질했다. 마침내 혜문왕은 상앙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수배자 신세가 된 상앙은 진나라에서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이유는 자신이 만든 법령 때문이었다. 여관에 투숙하려면 여행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상앙은 도피 중의 지금의 시안 근처 함곡관의 어느 객사에 묵으려 했을 때였다. 여인숙 주인은 그에게 “여행증명서가 없는 사람에게 숙소를 제공하면 상앙의 법에 따라 연좌되어 형벌을 받습니다”라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전에 위나라와의 전쟁 승리 공으로 받았던 상나라 땅으로 들어갔다. 군대를 조직해 진 조정의 군대에 맞섰지만 결국은 체포됐다.
상앙은 수레에 팔다리 사지가 묶여 찢어 죽이는 거열형으로 한 시대를 마감했다. 거열형도 역시 상앙 자신이 만든 형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아침 안개처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인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권력을 누리며 백성을 부렸지만, 정상에 오르면 내려가야 한다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도가 높을수록 몸은 편해지고, 권세는 높을수록 위태롭다”고 기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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