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대청제국
중국이 신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이같은 중국 의 부국강병정책은 1800년대부터 1949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까지의 중국 근현대사를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100년 간 치러진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과 저항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통해 군사력 강화를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청나라 중반까지 세계제국이었던 중국이 이 시기에 영국과 미국,프랑스 등 제국주의 세력에 맥없이 무너졌던 이유는 농업 중심국가에서 탈피하지 못 한 채 서구의 과학기술에 대해 무시하거나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은 일본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을 먼저 침공했고, 명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병해 국경선 밖에서 일본군을 저지하기는 했으나 정유재란 때는 노량대첩에서 명나라 장수 덩쯔롱(鄧子龍)장군이 전사하기도 했다.
세계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
그 뒤 200년이 지난 1840년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 대륙은 제국주의 세력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반식민지 상태로 들어갔고 1894년 청·일 전쟁에서도 패했다. 1900년 6월에는 수도 베이징이 영국과 프랑스,미국,일본,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8개국 군대에 의해 분할 점령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당시 베이징 시민들은 자기가 사는 구역을 점령한 국가의 국기를 대문에 걸어야 했을 정도로 수모를 당했다.
또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대륙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8년간 항일 전쟁을 벌였고,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이 내전을 벌일 때도, 중국 공산당은 미국과 영국의 군사지원을 받고 있던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맞서 싸웠던 역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근현대사를 압축한다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저항이었기에 지금도 중국 지도부나 중국인들의 뇌리에는 ‘반제국주의’라는 역사적 교훈이자 각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국력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깨달은 것이다.
대청제국, 세계 변화에 둔감
17세기 말부터 시작해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부터 5대 옹정제, 6대 건륭제에 이르는 100년의 태평성세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가 완성될 정도로 부강한 시대였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은 18세기 말 영국의 산업혁명과 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 등 격동하는 세계 변화에 둔감했다.
전통적인 농업국가인 중국은 세계의 근대화 물결을 파악하지 못 한 채 앞으로 닥칠 국가적 대재난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제국주의 영국은 식민지 쟁탈에 나서 아시아의 인도를 먼저 손에 넣었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인도는 제국주의 원료공급처이자 영국산 상품의 소비처로 전락했다. 영국이 다음으로 먹잇감으로 삼은 것은 중국이었다. 당시 영국은 중국차를 대량수입하면서 무역역조 현상이 지속되자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팔기 시작했다. 당시 국제거래 화폐는 은이었는데, 중국으로 대량 반입된 은이 다시 아편판매로 영국으로 유입됐다.
1840년 4월 영국의회는 중국과 전쟁거부 안을 5표차로 부결시키고 그해 6월 마카오항 맞은편에 정박해 있던 영국 전함들은 중국대륙을 향해 전쟁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부르는 아편전쟁은 시작됐다.
그런데 양국의 전력을 보면 아편전쟁 초기에는 영국군은 7천명에 불과했고 청나라 군은 80만명에 육박했다. 물론 전쟁 후기에 영국군은 2만명으로 증원되기는 했지만 청나라가 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영국은 산업혁명을 완성한 나라였지만 중국은 여전히 낙후된 농업국가였다. 대포 등 신식무기에서 우세했던 영국은 쉽게 중국군을 제압했다.
아편전쟁 계기 반식민지 국가로 전락
아편전쟁의 패배로 1842년 8월 29일 체결한 불평등한 난징조약을 통해 중국은 영국에게 홍콩을 넘겨줘야 했을 뿐 아니라 전쟁 배상금으로 은 2천100만량을 물어줘야 했다. 이와 함께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5개 항구를 강제로 개항해야만 했다. 난징조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중국은 미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잇따른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국주의 국가들이 나눠먹는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치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57년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와 연합해 광저우 시를 침략해 점령한 뒤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수도 베이징의 관문인 톈진까지 점령하자 청나라는 또다시 굴욕적인 톈진조약을 맺었다. 바로 2차 아편전쟁이다.
이 조약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은 외교사절이 베이징에 상주할 권리를 갖게 됐고 아편 무역의 합법화, 배상금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은 200만 냥 지불 등 청나라는 그야말로 빈사상태로 빠진다.
이어 1856년부터 발발한 2차 아편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군은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까지 들이닥쳤다.
베이징에 진입한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황제의 별궁인 원명원에 침입해 각종 귀금속으로 만든 장식품과 문화재를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영·프·미 등 8개국, 베이징 동시에 점령
당시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두 명의 강도가 원명원에 들어가 잿더미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여기서 두 명의 강도는 바로 프랑스와 영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도 중국 내에서는 1860년대부터 “서방을 배워 서방을 물리치자”는 양무운동이 시작되고, 1865년에는 청 조정 차원에서 상하이에 총포와 탄약, 기선 등을 만드는 군수공장 강남제조국이 설립되기도 했다. 또 육·해·공군이 조직되고 과학기술이 앞선 서양에 국비유학생까지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치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94년 갑오년 조선에서는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고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군이 조선에 투입됐다. 조선농민봉기군을 진압한 청일 양국 군대는 조선 땅에서부터 전쟁을 시작했다. 3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해 일본군과 전쟁했던 상황이 다시 재현된 것이다.
청나라는 결국 패했고 일본에 전쟁 배상금으로 2억3천량의 은을 물어줘야 했는데, 이는 청일 전쟁 발발 전 청 나라 정부의 3년간 재정수입을 같은 액수였다. 반대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음으로써 4년 간 재정수입에 해당하는 수입을 한꺼번에 확보해 일본의 산업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기회를 만들어냈다.
과거 당나라 시대 섬나라 일본으로부터 유학생을 받기도 했던 대당제국의 중국은 1천년 만에 거꾸로 치욕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일본과 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충격이 컸다. 결코 우연은 아니였지만 청나라 조정이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경제적으로 일본보다 낙후돼 있었다.
이처럼 1800년대 중국의 역사는 일본과 서양제국주의에 유린당한 치욕의 역사로 다 채워지다 시피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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