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43] 영원한 총리 주은래, 인민을 위해 살다 간 지도자

특권을 거부, 청빈·솔선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헌신'

2015-12-01     정거배 기자


1976년 1월 15일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화장을 마친 뒤 비행기에 태워져 그가 모든 삶을 바쳐 사랑했던 조국 강토 위에 뿌려졌다. 이날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는 이례적으로 조기가 걸렸다.

격동의 78년을 살아온 대륙의 혁명가이자 권력의 2인자인 그는 또 이런 유언을 남겼다. 추도식을 크게 치르지 말 것과 부부이기에 앞서 영원한 혁명동지인 덩잉차오(鄧穎超)는 아내로서보다는 전우의 자격으로 추도식에 참석해 줄 것, 모든 재산을 당에 기부할 것을 유언장을 통해 당부했다.

자녀가 없었던 저우언라이는 또 조카들을 향해 이렇게 유언했다. ‘반드시 기억해라. 혁명의 길 위에서 친척이라는 이유로 특권을 누려서는 안된다.’

가난한 중국의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는 총리이지만 암으로 투병하고 있었던 그는 눈을 감기 직전 친척들에게도 자신의 장례식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유언을 했다.

“친척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직무를 다하도록 하고, 장례식 참석을 위해 베이징에 오지마라. 만약 반드시 베이징에 오려고 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차비를 부담하게 하라. 단돈 1원도 정부에서 지출해서는 안된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개혁개방의 상전벽해 시대를 넘어 G2국가에 올라선 지금, 중국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많은 이들은 저우언라이(主恩來)라고 대답한다.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인터넷검색 엔진 바이두에 그의 이름을 입력하면 이렇게 소개한다.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중국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중요한 지도자...그의 탁월한 공로와 숭고한 인품과 덕성, 훌륭한 인격은 전국 각 민족 인민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찬사는, 오는 2016년 1월 8일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되지만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1972년 미국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역사적인 중국방문을 했던 닉슨 전 대통령은 “마오쩌둥이 없었더라면 중국 혁명이라는 불은 발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우언라이가 없었으면 불은 이미 다 타서 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닉슨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위대한 파괴자’ 마오쩌둥보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 ‘위대한 설계사’ 저우언라이를 더 높게 평가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 위대한 설계사

미국과 영국이 지원하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에 상대가 될 수 없었던 마오쩌둥의 홍군이 결국 승리하고 오늘의 신중국을 세웠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 수많은 분석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오늘의 중국이 있기까지의 동력 가운데 하나는 당시 지도자그룹의 도덕성이었을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중에서도 그의 전 재산은 옷 두벌과 담요 한 장이 전부였다. 1949년 10월 지금의 신중국이 성립된 후 그가 세상을 뜨기까지 30여년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이자 최고 권력의 자리에 있었지만 나무침대에서 잤고 두 가지 요리에 탕 하나에 식사를 했다. 매주 두 끼 식사는 거친 잡곡을 먹었다.

중국경제가 어려웠던 불황기에는 그는 몇 달이고 고기식사를 하지 않았다. 옷을 꿰메고 또 꿰메어 입었다.

1958년 가을, 저우언라이 총리가 하남성 정저우(鄭州)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수행원이 소매와 옷깃이 꿰멘 자국으로 너덜너덜한 옷을 복무원에게 세탁을 부탁했다.

옷을 받아든 복무원은 “총리를 수행해 외국에도 나가는 분이 이런 낡은 옷을 입고 다닙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수행원은 “내 것이 아니라 총리의 속옷입니다“라고 말했다.

전쟁 중에는 옷 두벌과 담요하나

저우언라이의 잠옷 중에서 한 벌은 1950년에 산 것이었는데 바느질 자국 투성이었지만 1976년 1월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 입고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는 조카인 주이휘가 집안형편이 매우 어려운 가운데 장쑤성 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조카 주이휘는 처음에는 장학금을 받았지만, 저우언라이 총리는 그에게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하는 대신에 총리 월급에서 그의 생활비를 댔다.

1952년 조카 이휘가 베이징 공립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저우총리는 조카에게 “말을 할 때나 생활기록부를 작성할 때든 언제든지 총리의 조카임을 밝히지 말 것”을 거듭 당부했다. 저우총리는 “네가 내 조카인 것을 사람들이 알면 무은 일을 하든지 너를 봐줄 것이고, 네가 못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우월감을 갖게 될 것이고, 너의 발전 또한 느릴 것이다.”

조카 이휘는 중학교 졸업하고 베이징 철강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총리의 조카임을 밝히지 않았다. 이휘가 공산당에 입당할 때가 되어서 당 조직에서는 그의 가정 출신과 가족관계를 조사했는데, 그때서야 이휘가 총리의 조카임을 알게 되었다.

사마천이 말한 정치인 자격을 갖춘 인물

5천년을 이어온 장구한 중국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 뿐 아니라 불세출의 영웅호걸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 저우언라이만큼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지도자는 없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2천 년 전 삼황오제와 하·은·주 시대부터 서한의 무제 때까지 3천년의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은 ‘가장 못나고 무능한 정치가는 백성들과 다투는 자’라고 규정했다. 사마천은 정치는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라며 정치의 본질을 정의하며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고 제시했다.

그렇다면 저우언라이는 사마천이 말한 정치인으로서 조건을 갖춘 인물이다.

저우언라이를 압축해 소개한다면 ‘권력의 자리에 있었지만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스스로 특권을 거부하고 솔선수범했다.’는 것이다. 특히 ‘죽의 장막’으로 고립된 중국을 세계사 전면에 다시 등장시킨 주인공이 바로 저우언라이였다.

총리와 외교부장을 겸한 그는 1970년대 외교일선에서 실용주의적인 실사구시의 태도로 갈등과 대결보다는 화해와 타협을 추구함으로써 중국을 국제사회로 복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중재의 달인이자 온건하고 성실한 자세는 미국 등 서구 지도자들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낸 것이다.

1972년 닉슨 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저우언라이 총리는 <논어>의 구절인 ‘친구가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를 인용해 환영사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외교가로서 타협과 중재의 달인

그는 생각하기를 ‘최고의 재능이란 최고의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는 인물끼리 서로 협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배가 아니라 설득으로 중국의 지도층을 단합시켰고 당내 파벌 싸움이나 분쟁을 해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페어뱅크(J. K. Fairbank)는 “언제나 조직을 단합을 추구했고 결코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다”며 저우언라이를 회고했다.

‘천하의 흥망이 어떤 인물을 기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 사마천의 명언이 적중한 것은 저우언라이를 기용한 마오쩌둥이었다고나 할까?

1935년 10월 장시성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포위공격을 피해 죽음의 탈출로 시작한 대장정에서부터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기까지, 그리고 다시 1950년대 대약진운동에 이어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함께 한 동지였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같은 해인 1976년 1월과 9월 세상을 뜬 것은 결코 우연이었을까?

대장정 과정인 1935년부터 40여년 동안 중국권력의 1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마오쩌둥은 2인자인 저우언라이를 가리켜 “사리사욕이 전혀 없는, 고상하고 순수하며 도덕적인 사람이자 인민해방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류샤오치 주석 등 마오쩌둥의 혁명 동지들이 홍위병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과 고통을 당하고 있던 문화혁명의 와중인 1974년 강청과 왕홍문,장춘교,요문원 등 4인방은 저우언라이를 제거할 한 가지 모사를 꾸몄다.

그해 11월 마오쩌둥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왕호문은 ‘저우언라이 총리가 여러 간부들이 만나는 등 비밀음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고자질했다. 이 말을 들은 마오쩌둥은 냉소를 지으며 “저우언라이 총리는 음모를 꾸미지 않는다”며 일언지하에 무시해 버렸다.<계속>